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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항공대기업이다. 아시아나항공은 항공그룹을 평가하는 기관인 스카이트랙스에서 세계 1위를 기록할정도로 그 규모와 서비스가 전세계적으로 인정을 받았다. 하지만 모기업의 경영부실과 코로나로 인한 실적악화로 아시아나 항공은 대한항공과 합병의 절차를 밟고있는데 금호그룹의 역사와 몰락의 원인에 대해 설명하겠다.
금호그룹과 아시아나 항공의 탄생
금호그룹의 시작은 1946년 전라남도 출신의 박인천이 세운 광주고속에서 시작되었다. 박인천은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 경찰이었는데 1945년 일본이 패망하기 두 달 전에 태평양 전쟁에서 연패한다는 소식이 들리자 혼잣말로 일본이 망할것같다라고 하였던것을 일본인 형사에게 발각되서 파면이 되었다. 그 덕분에 해방 후 반민특위 대상에서 제외되고 당시 친분이 있었던 조선인 지주들로부터 돈을 빌려서 자동차를 구입한뒤 광주에서 택시사업을 하게 된다. 택시로 부를 축적하자 버스운송사업으로 확장하게 되는데 이는 금호고속의 시초가 되었다. 그때 당시 회사명칭은 광주고속 이었는데 광주고속은 다른 큰 기업과 다르게 차량 성능은 뒤떨어졌지만 전라도 특유의 애향심과 속도보다는 안전을 내세우는 전략으로 호남에서의 시장을 빠르게 독점해 나갔다. 그 바탕으로 박인천 창업주는 타이어사업에 진출하였고 나아가 건설업과 석유사업등 회사의 몸집을 빠르게 키워나갔다. 여기서 자신의 호인 금호라는 명칭을 착안하여 금호그룹으로 회사의 명칭을 바꾸게 된다.
박인천 창업주의 별세후 장남인 박성용이 회장을 맡으면서 기업이 급속도로 성장하기 시작하였다. 부실한 상태였던 금호건설을 광주고속에 합병하여 적자를 만회하였고 무엇보다 가장 큰 기회가 되었던 계기는 1988년 서울 올림픽이었다. 이때는 대한항공이 대한민국 유일의 국적항공사였다. 하지만 나라의 경제가 성장하고 이로인해 물동량이 늘어나자 항공사업은 대기업의 활로가 되었다. 면허를 취득하기위해 여러 대기업이 경쟁하였고 최종적으로 금호그룹이 민영사로 선정되어 이때부터 금호그룹은 항공사를 품게 되었다. 민영사 취항후 금호는 미국의 보잉으로부터 최신 항공기중 한대를 구입해 국내선을 운행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1989년 해외여행 전면 자율화가 이루어지고 여행사들은 각종 해외여행 패키지를 내놓으면서 항공사업은 엄청난 붐을 일으키게 된다. 아시아나 항공은 대한항공보다 뒤늦게 취항하였기때문에 비행기종도 최신형모델이었는데 이로인해 대한항공보다 안전함과 쾌적함을 내세우고 프리미엄 서비스를 도입하여 사세를 확장해 나갔다.
금호그룹의 성공가도
대한민국 경제사 중 잊을수 없었던 1997년 외환위기를 겪게 되면서 승승장구하던 금호그룹 또한 이 위기에서 자유로울수가 없었다. 이로인해 해외로 떠나는 여행자도 급락하였고 게다가 주력 산업이었던 석유산업과 건설산업 그리고 타이어 산업이 덩달아 어려워지게 되었다. 하지만 1998년은 우여곡절 끝에 호남출신인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이 되게 된다. 이로인해 호남을 대표하는 기업인 금호그룹은 구조조정을 강하게 요구받은 여타 대기업과 다르게 구제의 기회를 받게 된다. 정부의 도움을 받으며 금호타이어와 금호건설을 합병하여 회사 경영체제를 바꾸고 성공적인 구조조정을 하게 되었다. 이후에 외환위기를 극복하고 경제가 서서히 회복되었고 박삼구 회장의 취임 이후 2004년에 금호그룹은 사명을 금호아시아나로 바꾸게 된다. 박삼구 회장은 이 그룹을 대한민국 재계순위 10위안의 그룹을 키우겠다는 원대한 꿈을 키웠다. 이를위해 2006년 당시 한국건설사 순위 1위였던 대우건설의 6조 4200억원에 인수하였다. 당시 금호의 대우건설 인수는 단위 회사 인수금액으로 역대 최고액수를 기록하였다. 박삼구 회장은 6조가 넘는 인수금액을 감당하기위해 먼저 금융사에서 차입하고 나머지는 사모펀드투자자들을 통해 조달하였다. 게다가 3년 뒤에 투자자들의 주식을 31,500원에 구입하기로 합의를 하였는데 당시 대우건설의 주가는 13,000원대에 불과하였다. 이처럼 무리한 인수를 하자 당시 석유화학 부문을 거느리고 있었던 박찬구 회장과 많은 갈등을 낳았고 이는 후에 석유화학그룹과 분리되는 계기가 되었다. 또 박상구회장은 대우건설에 멈추지 않고 2008년에는 택배와 물류회사였던 대한통운 또한 인수를 하게 되었는데 이 결과로 금호아시아나 그룹은 대한항공의 한진그룹을 제치고 2010년 대한민국 재계서열 7위까지 도약하게 된다. 그리고 아시아나 항공은 스카이트랙스에서 세계 1위 공사로 평가를 받을만큼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는 항공사가 되었다. 또 저가항공사인 에어부산을 설립해 상대적으로 열세였던 영남권 국내선 항공시장도 장악하기 시작하였다. 금호아시아나 그룹은 아시아나 항공뿐만 기술력을 인정받았던 금호타이어 그리고 석유화학 사업부문, 건설사와 대형 택배물류회사까지 보유하고있어 대한민국과 세계에 많은 영향력을 발휘하는 그룹으로 명성을 날렸다.
금호아시아나의 위기와 대한항공과의 인수 협상
금호아시아나그룹은 엄청난 위세를 떨쳤지만 위기는 얼마 안가 찾아오게 된다. 2008년 리먼 브라더스 파산으로 시작된 전세계 금융위기가 한국또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 당시에는 대우건설을 인수하기위해 많은 차입을 하였던 시기인데 이 금융위기는 건설경기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로 인해 2009년 금호건설과 금호타이어는 기업회생절차를 신청하게 되고 이는 금호아시아나그룹 몰락의 신호탄이 되었다. 당시 무리하게 인수한 대우건설을 헐값에 매각하지만 이정도로는 부채를 해결할수가 없었고 결국 우량한 계약사들도 매각을 하게 된다. 당시 국내 렌트카 시장 1위였던 금호렌터카를 KT에 매각하였고 당시 현금흐름을 많이 창출하였던 대한통운도 CJ그룹에 넘겨주었다. 이뿐만 아니라 금호고속을 탄생시키고 본거지와 같이 보유하고있었던 광주 유스퀘어 터미널 부분을 일부분도 매각하게 된다.그리고 이 불똥은 한때 세계항공사 서비스 1위를 기록하였던 아시아나 항공으로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룹 위기상황에서 기업의 수익을 극대화 시키기위해 노선을 무리하게 운영하였고 이로인해 각종 사건사고도 생기게 되었다. 2013년에는 인천에서 출발해 샌프란시스코를 향하던 아시아나항공기 추락하는 사고가 발생해 3명이사망하고 181명이 부상당하고 2015년에는 아시아나항공 162편이 착륙 중 활주로에서 이탈하는 사고가 발생하여 기체가 전부 파손이 되는 사고는 겪게 된다. 또 기내식을 싣지 않고 이륙하는 어이없는 사건도 발생하는데 이러한 각종 사건은 아시아나항공의 이미지에 치명상을 입히게 되었다. 결국 박삼구회장은 2019년에 금호그룹의 회장을 사임하게 되는데 그의 무리한 기업인수과정과 경영악화는 사실상 금호그룹을 해체하였고 현재 금호아시아나항공은 대한항공에 인수되는 절차를 밟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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